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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엔트 공의회는 성사에 대한 교의 결정에서 성사가 사효적으로 작용한다고 규정하였다(DS 1608; 1612). 공의회 이 결정은 역사 안에서 성사의 유효성을 성사 집전자의 주관적인 신심의 정도와 윤리성에 종속시키려는 경향에 반대한 것이다. 성사는 성사 집전자나 성사 수취자의 의로움이 아니라 성사의 본래 집전자인 그리스도의 능력을 근거로 효력을 낸다. 그래서 성사가 교회의 의향에 따라 거행되면 집전자의 개인적인 성덕과 관계없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령의 힘이 성사 안에서 성사를 통하여 작용한다.

이 가르침은 내용적으로 성서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즉 신구약 성서에서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신앙과 성덕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느님의 사랑과 자유 때문에 주어진다. 하느님의 은총은 항상 인간에 앞서 오시고 인간의 죄와 잘못을 넘어서신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스콜라 신학자들은 ex-opere-operato 정식의 성서적 근거를 찾으려고 하였다. 그들은 “...로부터”(εχ), “무엇을 통하여”(δια)라는 전치사나 도구적 3격, 4격을 사용해서 세례의 효력을 암시한 신약성서의 구절들을 발견하였다: “물과 영으로부터” 다시 태어난다(요한 3,5), “재생의 목욕을 통해서” 구원하셨다(디도 3,5), 교회를 “물로 씻어서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다(에페 5,26). 이 구절들 모두는 하느님, 그리스도 혹은 성령이 본래적 행동의 주체이며 구원을 허락하는 주체라고 증언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성사의 사효성은 주술적으로 잘못 이해될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아무리 성사의 사효성에 대한 이론적인 측면에 하자가 없다해도 실제적인 운영에 있어서는 문제가 있었다. 그 예로는 교황 베네딕도 14세를 들을 수 있다. 그는 1747년 유다인 아이의 세례에 대해 언급하면서 유다인 아이에게 그 부모의 뜻을 거스려 세례를 주는 것을 용납하는 관습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일단 이렇게 베풀어진 세례라도 유효하다고 보고는, 그 경우 세례 받은 아이는 유대인 부모에게서 떼어내어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교육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DS 2562). 이렇게 볼 때 성사의 사효성에 관한 가르침은 이론과 실제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드러냈다. 성서에 근거한 하느님의 주권적 행동을 강조하는 이론이 잘못하면 성사를 마술화하거나 ‘자동 은총생산기’처럼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사의 유효성을 판가름하는 데에 있어서 가톨릭 교회는 사효성을 위주로 가르쳐온 것이 사실이다. 성사의 효력을 성사집전자의 성덕에 결부시키려는 엄격주의자들 (3세기의 치쁘리아노, 도나투스파, 발두스파, 카타리파등)의 거듭된 저항에 맞서서 사효성을 강조한 것을 이해하지만, 일방적으로 이것만을 강조한 것에 대한 부작용도 적지 않았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실상 교회가 성사의 유효성을 판가름하는 데에 성사집전자의 준비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적어도 최소한의 조건은 요구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유효한 성사를 위해서는 성사 집전자의 지향(intentio)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1) 피렌체 공의회는 성사가 유효하게 거행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하는 것을 하고자 하는 지향”(cum intentio faciendi, quod facit Ecclesia)이 있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DS 1312). 이 가르침은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도 수용된다(DS 1611).

오늘날 적지 않은 신학자들은 스콜라 신학이 성사의 사효성을 일방적으로 강조한 데에 따르는 부작용에 대해서 너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최소한의 경우가 아니라 최선의 경우을 상정해서 이를 성사 집전의 기준으로 삼으려 한다. 예를 들어 스킬러벡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교회가 자신의 본질로부터 본래적으로 요구하는 정상적인 상황이란 집전자가 자기 직무의 행위를 사도직에 자기 자신을 바치고자 하는 표현으로 그리고 자기가 수여하는 성사를 통해 사람들을 진정으로 성화시키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수행하는 성사 집전이다”.2)

단지 유효성만을 목표로 하지 않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진정한 응답이 되는 성사 거행을 목표로 한다면 성사 집전자는 성사 거행에서 자신의 신앙을 능동적으로 표현하고, 실제로 그에 참여하면서 증거하고자 하는 지향을 지녀야 할 것이다. 이런 지향의 상태에서 교회의 객관적인 증거와 근본 의도가 성사 집전자의 주관적인 증거, 실제적인 의도가 일치되는 것이고, 이를 통해서 성사 집전자의 전체적인 삶이 그가 맡은 교회의 직무에 상응하게 된다.3)

교회의 지향과 성사 집전자의 지향의 일치는 단지 경건함이나 성실함, 성사를 받는 사람이 어떤 관심을 갖고 있는가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실제적이고 전문적인 (예를 들자면 심리적, 교육적) 능력, 적어도 이를 얻기 위해 항시 최상의 노력까지도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예절을 자체는 경건하게 거행되고 그를 통해서 하느님의 구원 약속에 대한 보증이 이루어진다해도 성사를 받는 이들에게 전혀 와 닿지 않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말하자면 성사의 지향과 성사가 목표로 한 집단이나 개인의 구체적인 체험 사이에 틈이 생기게 된다. 어떻게 하면 제대로 복음 내용을 선포하고 전달할 수 있을까 고심하는 성사 집전자라면 개인적으로 최대한 자신의 지성, 능력, 주위 상황을 이용할 것이다.

그러면 성사를 받는 사람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가? 교회는 전통적으로 유효한 성사를 성립을 위해서 성사를 받는 사람의 내면적인 종교적 의향이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라고 가르쳐왔다. 교회를 통하여 성사를 받는 사람에게 전해지는 그리스도의 은총은 어떠한 인간적 응답을 선행하고, 성사는 인간이 응답을 하지 않는 때에도 은총의 참된 보증으로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효성을 아주 무시하지는 않았다. 즉 트리엔트 공의회는 은총이 사효적으로 부여된다고 천명하는 동시에(DS 1618) 성사를 받는 사람 개인의 마음 준비와 협조에 대해서 언급한다. 즉 “아무런 장애를 갖고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non ponentibus obicem) 은총이 부여된다는 것을 거부해서는 안된다(DS 1616)고 명시하였다. 수동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성사가 결실을 맺기 위해서 인간의 내적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밝혔던 것이다.

은총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 성사 수취자에게 내적 장애가 없어야 한다는 수동적인 표현을 사용한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중세에 성사를 받고자 하는 의향을 명확히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 예를 들어서 유아에게 세례를 주는 경우나 의식이 없는 이에게 종부성사를 부여하는 경우에 합당하고 유효하게 성사를 받을 수 있느냐에 대해서 토론이 있었다. 그 당시의 신학은 - 大 알베르또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을 따라서 - 장애가 없다면 합당하고 유효하게 성사를 받을 수 있다고 규정지었다. 여기서 장애란 성사를 받지 않으려는 분명한 의도 그리고 참회의 준비가 없는 중죄의 상태를 말한다. 성인 영세의 경우 세례를 받고자 하는 의도, 즉 신앙이 없는 경우 곧 장애가 있는 것이다. 또 고해성사의 경우 통회가 없으면 장애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불신앙이든 참회가 없는 상태이든, 혹은 중죄의 상태이든 ‘장애’가 제거되는 즉시 하느님께서 약속하시고 실제로 주신 구원이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스콜라 신학에서는 ‘재생’(reviviscentia)라고 일컬었는데, 세례, 견진, 성품성사의 경우 성사를 통해 받은 인호에 근거해서 재생이 가능하다.

현대의 신학은 성사 수취에 필요한 최소한의 규정을 논하거나, 장애물 제거등의 소극적인 자세를 탈피해서 좀 더 적극적 준비를 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이런 적극적 준비가 성서의 정신에 더 부합하다고 하겠다. 세례와 성체 성사가 공동체의 삶 안에서 확고한 모습으로 이미 자리 잡았던 초대 교회에서도 세례를 통해서 교회 공동체에 들어오기 위해서, 성찬례를 통해서 구원에 참여하기 위해서 제시한 요구 사항은 결코 가볍지가 않았다. 신앙 없이는 세례들 받을 수가 없었다(사도 2, 41; 8,12.37; 마태 28,19; 마르 16,16). 죄 많은 삶을 청산하는 것을 포함하는 회개 없이는 세례를 받을 수가 없었다(사도 2,38). 무엇보다도 세례에 앞서서 짧은 형태로이든(사도 8,31; 10,34-48) 긴 교리 교육의 형태이든(사도 8,4-25) 하느님 말씀의 선포가 이루어져야 했다. 사도행전에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신자가 되는 것을 나타내는 데에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일정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2,41이하; 8,14). 주의 만찬에 참여하기 위해서 아무런 정신 상태나 윤리적인 자세로써는 안된다는 것을 가장 잘 드러내는 구절은 1고린 11,17-34이다. 여기에서 주님의 성찬에 “합당치 못한”(27절) 자세들, 즉 공동체 안에서의 파당,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무관심, 가난한 이를 부끄럽게 하는 행동, 자기 양심에 대한 성찰의 결여 등이 언급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형제적인 일치의 예식을 불성실하고 위선적인 행위로 변질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서의 내용을 보더라도 신앙인이 가능한 최선의 준비 자세로 성사에 참여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겠다.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봄의 따듯한 햇볕은 똑같지만 대상에 따라서 그 효과는 다르다: 봄볕은 잠자던 나무들을 일깨워 꽃피게 할 수는 있지만 죽은 나무가지나 말뚝에는 꽃을 피울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스킬러벡스가 성사 수취자의 자세가 성사의 본질적인 부분에 속한다고 주장한 것은 타당한 견해라고 생각된다.

이런 모든 점을 종합해서 성사의 사효성과 인효성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이중적 기준을 제시할 수 있겠다: 성사를 통한 본래적으로 활동하는 이는 인간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성사의 사효적 작용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성사의 집전자나 성사를 받는 이의 마음준비를 약화시켜는 안된다. 반대로 성사 집행자나 성사를 받는 이의 태도나 열심을 강조한 나머지 성사의 사효성을 약화시켜서 결과적으로 성사의 본래 집전자인 그리스도의 능력을 약화시켜서도 안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성사를 근본적으로 공동체적 기도로 고찰하는 견해가 주목할 만하다. 오스트리아 인스브룩의 교의신학자 슈바거(R.Schwager)는 성사란 예수의 이름으로 바치는 공동체의 기도라고 주장한다.4) 성사 안에서 바치는 기도는 개개인이 사적으로 바치는 기도가 아니라, 구약의 계약의 기도처럼 공개적으로 공동체가 바치는 기도이다: 공동체가 공개적으로 바치는 기도이기에 일정한 형식의 말과 모든 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상징을 사용한다. 그런데 이 기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바쳐진다. 신약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의 이름은 구원을 주는 이름이고(사도 4,12), 예수의 이름으로 바치는 기도는 하느님이 확실히 들어주신다(마르 11,24; 마태 7,1-11,22; 요한 14,13 이하; 16,23 이하). 예수의 이름으로 바치는 공동체의 기도로서의 성사는 확실한 효력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사를 예수의 이름으로 바치는 공동체의 기도로 보는 관점은 성사의 사효성을 보장하고 동시에 인간의 준비를 최대한 요구한다. 즉 성서의 증언에 의해서 예수의 이름으로 바치는 기도는 확실히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성사의 사효성이 보장된다. 기도할 때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낮우고 열어 보여야 하는데 이는 인간의 성실한 준비를 의미한다. 그밖에서 성사를 기도의 관점에서 고찰하는 것은 성사를 에피클레시스, 즉 성령이 임하시기를 구하는 청원을 전례의 중심적 요소로 보는 동방교회와의 접근을 수월하게 한다. 칼 라너도 7성사, 특히 병자성사를 기도로 보았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