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나눔기술"에서 "씨앗 포기 선언"을 발표한 다음 내가 썼던 글이다. 지금 다시 봐도 안타깝고 착찹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우선 이번 나눔기술의 씨앗 포기 선언을 듣고, 매우 불쾌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물론 '회사의 사정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라고 하실 지 모르지만, 글쎄요... 약 2년 동안 씨앗 농사를 키워 온 저로써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말, 정말 말 같지도 않은 말이라고 생각되는군요.
제가 처음 "씨앗"을 알게 된 것은 구 큰틀(KNTL) 게시판이었습니다. 한참 '씨앗'에 대해서 여러 가지 글들이 올라왔던 그 때, 저는 씨앗 역시 '한베와 같은 그저 그런 언어이겠거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질문하는 사람들의 글에 너무나도 열정적으로 답하시는 박석봉(trpfff)님의 태도를 보고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래서 석봉님의 글 중에 분량이 좀 많다고 생각되는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 글을 읽고, 저는 "씨앗은 예전과 같이 그런 시시콜콜한 언어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고, 씨앗을 한 번 심어 보자고 다짐했습니다.
우선 제가 씨앗을 심기 전에, 내가 씨앗에 대해서 궁금한 점들을 10가지로 정리해서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박석봉님께서 매우 친절하고 자세하게 답변을 해 주셨고, 고맙게도 장영승 대표이사께서도 직접 글을 올려 주셨습니다. 그 글을 여기에 다 실었으면 좋겠지만, 쓸데없이 파일의 크기만 늘어날 것 같아서, 가장 중요한 대목을 올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 한가지가 남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눔기술'의 "약속"입니다. 현재 '씨앗'은 아직 초보 단계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고, 많은 노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C를 창안한 AT&T에서도 처음 B언어를 개발하고 거기서 C를 개발했다고 들었습니다. 나눔기술의 여러분들께서, 앞으로 어떠한 역경과 고난이 있더라도 '씨앗'을 꽃피우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 주시겠다는 것을 약속 해 주신다면, 현재 씨앗이 여느 언어에 비해 미약하다 하더라도, 당장 쓰는데 불편하고, 속도가 떨어지고 비 능률적인 코드를 생성하더라도, 좋은 라이브러리가 없고, 또 통합환경이 빈약해도, 그리고 그 기반인 '태극'이 완벽하지 못해도,... 저를 비롯한 '씨앗'을 아끼는 사람들은 계속 관심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나눔 기술이 단지 이윤 추구를 위해서 지금 이 일을 하게 된다면, '씨앗'은 끝끝내 꽃을 피우지 못하고 스러져 버릴 것입니다. 나눔 기술의 이와 같은 확고한 약속이 있다면, 저는 지금 당장 '씨앗'을 심겠습니다. 처음부터 훌륭한 언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몇번의 새힝 착오를 통해서 언어가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한 알의 씨앗이 큰 나무가 되려면 많은 고난과 정성이 필요하듯이, 지금 '씨앗'이 비록 C언어나 파스칼과 같이 대중화 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꽃을 피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태극'이 앞으로 더욱 더 완전해 진다면, 아직도 '태극'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태극'이 얼마나 유용한지를 알려줄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태극' 없이 돌아가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없을까?"하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이 '태극'의 필요성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태극이 정말 한글을 완벽히 지원해 주고, 그 기반 위에서 '씨앗'으로 만들어 진 풀그림들이 당당히 실행될 때, 그때는 응용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위해서 AUTOEXEC.BAT화일에 '태극'을 띄우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나눔기술의 여러분들, 끝까지 분투해 주십시오.
사실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위의 대목이었습니다. 위 글에서 말한 것과 같이, 당장은 씨앗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나눔기술의 확고한 약속이 있으면 씨앗을 심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박석봉님은 아래와 같이 답변해주셨습니다. 역시 다른 내용은 생략하고, 제가 위에 올린 글에 대한 답변만을 정리했습니다.(석봉님께 허락 받지 아니하고 글을 옮긴 점은 사과 드립니다.)
일요일날 (16일) 찬홍님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고마움과 함께 긴장감을 느끼면서 글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질문하신 내용에는 저희들이 고민했던 부분, 고민하고 있는 부분, 그렇게 하려고 하는 부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차례 차례 답하겠습니다. ...-중략-...
'씨앗'은 작지만 하나의 언어입니다. 언어가 생명을 가지는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는 언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저희들이 '씨앗'을 개발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것은 과연 이것에서 금전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가 아닙니다. 만약 처음부터 이윤을 생각했다면 시작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씨앗'을 만들어 오는 과정에는, 따뜻한 격려보다는 부질없는 짓, 쓸 데 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말을 더 많이 들었습니다.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작했고, 그러한 신념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저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들이 '씨앗'을 써 주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과정도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멀고 험난하다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찬홍님처럼 '씨앗'을 아끼고, 사랑하고, 또 실제로 사용해서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존재한다면, 저희들은 계속해서 '씨앗'을 키우고 발전시켜 나갈 것입니다. 아낌없는 관심과 사랑, 가차없는 질책을 바라면서 이 글을 마칩니다.
1994.01.18 18:00 박석봉
여기에 덧붙여서, 고맙게도 (주)나눔기술의 대표이사이신 장영승 님께서도 아래와 같이 답변을 해 주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나눔기술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장영승이라고 합니다. 늦게 인사드리게 되었습니다. 우선 <씨앗>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으로 그 동안의 저희의 노력에 대한 보람을 느끼게 해주신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 립니다.
저도 이 게시판을 하나하나 꼼꼼히 읽으며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글을 읽으며 때로는 반성도 되고 또한 때로는 힘을 얻고 아마, "이 곳이 바로 씨앗의 싹이 최초로 움틀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던 중 오늘, 김찬홍 님의 장문의 질 문중 마지막 <나눔기술의 약속>을 요구하시는 글을 읽고서는 다시금 우리의 각오를 분명하게 해야겠다는 생각과 제가 직접 말씀드려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불쑥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 김찬홍님 질 문중 기술적인 측면은 물론 이 란을 전담해오신 박석봉님(저의 회사 이사이자 씨앗개발의 총책임자십니다.)이 꼼꼼히 답변 해주실 겁니다.
나눔기술은 이제 4년째 접어드는 직원 서른 명 정도의 조그마한 회사입니다. 주로 대기업과 금융기관에 필요한 기술 자문과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업무를 주로 하고 있는 아직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도 않고 특별히 내세울 장점도 없는 평범한 회사입니다. 사장이 돈이 많은 회사도 아니고 여느 회사처럼 대기업이 출자하여 돈 걱정 없이 지내는 회사도 아닙니다. 어쩌면 커다란 자본 없이 조그마한 기술과 여러분도 가지고 있는 소박한 바램으로 시작했고 아직도 그러한 소박한 바램을 가장 커다란 무기로 생각하며 조금씩 발전해 나가고 있는 아직 '진행 중인' 그런 회사입니다. 이런 회사의 부설 연구소에서 소프트웨어 중에서 가장 개발이 어렵다, 돈이 안된다 하는 프로그램 언어와 컴파일러를 시작하게 된 것은 아마 어려운 과정에서도 우리의 노력이 가장 근본적일 때 가장 커다란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주위 사람들에게 "<상품화>를 생각하고 <씨앗>을 개발했는가"하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돈 안되는 그런 일을 무엇 하려고 했느냐"는 것이 그 질문의 요지지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직 하나, 우리 나눔기술이 가지고 있는 <상품화에 대한 의미>입니다. <상품화>는 기업이 행한 투자에 대하여 어떠한 이익을 보고자 하는 행위라는 측면 이전에 우리가 개발한 것에 대하여 사용자와 책임을 지겠다는 본질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눔기술에서는 처음부터 <씨앗>에대한 상품화를 생각했고 또한 현재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의 의미는 <씨앗>으로 소위 이윤 추구, 돈을 벌겠다는 의미가 아닌 사용자와의 약속을 지키고 희망을 같이 하겠다는 뜻입니다. <씨앗>은 우리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살펴보게 하는 매우 중요한 소프트웨어라는 믿음이 저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눔기술은 여러분과 약속드립니다. 씨앗은 계속 뿌려질 것입니다. 계속 좋은 종자로 개량해 나갈 것이며 씨앗이 효과적으로 싹틀 곳에 성실하게 <씨앗>을 들고 달려갈 것입니다. 싹이 트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지만 저희 힘이 다하는 한 끝까지 노력할 것입니다. 한순간 반짝이다가 없어지는 그러한 많은 경우를 저희 또한 많이 겪어 왔기 때문에 김찬홍님의 배신감의 깊이를 저희 또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믿어 달라!"라고 이야기하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냥 지난 3년간 그래 왔듯이 앞으로의 기간도 차분히 노력해 나가겠습니다. 단, 여러분들도 이제는 나눔기술과의 약속을 해주셔야 합니다. 저희에게도 무언 가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힘은 바로 여러분들의 의지입니다. 우리 것을 소중히하고 우리 것을 키우겠다는 의지. 바로 이 것이 모여서 씨앗의 싹을 틔우는 힘의 원천이 될 것일 겁니다. 비록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기존의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배운다. 또한 새로운 것을 남에게 설득시킨다라는 것이 웬만한 확신 가지고는 어려운 일입니다. 저희 나눔기술은 이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직은 구체적인 계획이 잡혀 있지 않습니다만 일단 씨앗을 심으시면 여러분에게 걸맞은 비료와 재배 방법을 제공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현재 검토되고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상품화를 통하여 보다 정연하고 강한 모습으로 여러분에게 나타날 것이며 또한 잡지 기고, 공개강좌 형태의 교육 및 홍보 계획과 각 교육기관의 정식 교과과정 진입, 씨앗 관련 동호회 지원, 쉐어웨어 개발자 지원, 씨앗 경진 대회 등 다양한 모습으로 여러분에게 다가갈 것입니다. 비록 많은 어려움이 우리에게 닥치겠지만 여러분의 열의와 애정이 뒷받침되어진다면 충분히 수행해 낼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시작은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아마 많은 씨앗이 싹을 틔우지 못하고 썩어 가겠지만 다른 씨앗의 양분이 될 수 도 있습니다. 저희의 <씨앗>은 썩어서 다른 씨앗들의 양분이 될 각오로 임하고 있습니다. 보다 적극적인 여러분의 관심과 동참이 필요합니다.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두서없는 글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1993.1.18
나눔기술 장 영 승
두 편의 글을 보십시오. 얼마나 믿음직스럽습니까? 사실 제가 씨앗을 키워오면서 여러 가지 절망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든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럴 때면 "에이, 이 따위 씨앗, 집어 치워 버리고 싶다"는 생각, 솔직히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석봉님과 영승님의 이 믿음직스러운 글을 되읽고 힘을 얻었습니다. 비록 씨앗이 부족한 점은 많지만, 이러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충분히 시간과 노력과 정렬을 쏟아도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나눔기술에서 씨앗 개발을 잠정적으로 중단한다고만 해도 이렇게 흥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씨앗을 포기하다니요! 분명히 박석봉님은,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멀고 험난하다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찬홍님처럼 '씨앗'을 아끼고, 사랑하고, 또 실제로 사용해서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존재한다면, 저희들은 계속해서 '씨앗'을 키우고 발전시켜 나갈 것입니다.